지역별로 약 9개 루트, 한 루트당 100명, 한 팀은 10명 내외로 여성과 남성이 고루 섞이며 여성 7, 남자 3의 비율.
9개 루트가 땅끝에서 시작해서 서울 임진각에서 한달뒤에 만나는 630km 대장정이었다. 7월에서 8월 사이인 한여름에 걸으며, 시간 당 약 5km, 하루 6시간을 최대로 30km 를 찍는다. 그러면 20일~30일 안으로 땅끝에서 임진각으로 만나며, 잠은 노숙하거나 텐트. 식사는 식사차량이 와서 급식을 한다.
대장님이 특전사 출신으로, 하루에 약 600ml 정도되는 물통에다가 끓인물을 한번씩만 급수 해 주었다.
그러니까 물통의 600ml 가 하루 할당량 이었다. 나머지는 급식의 국으로, 혹은 운좋게 수돗물로 해결해야 했다.
이유는 사망사고 때문이다. 무더위에 물을 많이 마시면 몸의 소금기가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한 여름 포도당을 먹기도 한다.
상상해보면 와닿는다. 7월에서 8월 무더위에 약 20키로의 배낭을 메고서 하루에 6시간 씩, 한달가량 걷는데 물을 600ml 밖에 못마신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다. 10명이 한 팀으로 가족처럼 누구보다 서로가, 서로를 챙겨야 한다.
그럼 만일 팀원 중 누군가가 급수 조절을 실패 했을 때, 물을 나눠주는 "이타심" 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기위해서 개개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가장 합리적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국토대장정 중 걸으면서 실제로 고민을 했었다. 왜냐하면 팀원들은 내 물통에 물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방도가 없다. 모두가 코팅된 주황색 물병이었기에 내용물을 알수없고, 불투명했다.
단지 나는, 물이 남았다 안남았다 이런식으로 스스로 급수를 조절 할 수 있었다. 즉 팀원의 요구를 은연 중 거부하고 "회피 할 수" 있었다. 내 물을 멋대로 꺼내서 흔들어 보는 무례적인 행동을 하기엔 모두가 어른스럽고 신사적이었다.
물론 실제 상황에서는 모두가 너그럽게 나눠마셨다. 600ml 는 생각보다 여유롭다. 중간중간 수돗물도 "몰래" 마시고, 밤이되면 대장님이 파상적으로 물을 공급 해 주기도 하였고, 수돗물이나 시냇물을 채운적도 있었으므로.
성비는 여자가 7 남자가 3, 가족적인 분위기. 우리팀은 정말 화기애애 하게 임진각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렇다면 더 극단적으로, 절반인 하루 급수가 300ml 라면? 화기애애 했을까? 서로를 속이거나, 부담감에 눈치를 보지 않았을까? 더 절박한 상황에서 어디까지 이기적이어야 하고, 어디까지 이타심을 행해야 하는가?
이타심은 의무가 아니다. 단지 양심과 인덕, 배려의 문제이다.
그것이 의무가 될 때는 상대방이 "죽기직전" "극단의" 상황일 때, 책임을 묻는다.
이것을 전제로 위에 그림을 그렸다.
전자가 자신이며 이기심. 후자가 상대이며 이타심. 무엇이 가장 합리적인 비율일까?
개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최상의 비율은 3번. 9:1 이 가장 합리적이다.
물론 5:5 가 가장 합리적이고 정의로우며 평화롭고 멋져 보일 수 도 있다.
그럼 스스로 자문해보길 바란다. 자신의 재산 중 실제로 절반을 타인을 위해 "기부" 하는 지 말이다.
세금도 안내려는 마당에?
그럼 이런 궁금증을 유발한다.
아니왜? 전재산을 기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이미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했거나, 굶어죽지않을 장치를 준비했거나, 임종직전 자식이없거나 자식들을 좀 나눠주고 나머지를 환원 하는 격이다.
합리적 이다 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이기심이 내포되 있지만 "효율적" 이라는 맥락도 포함되어 있다.
국토대장정으로 돌아가보자
가령, 내가 3:7 을 중시하는 극단적 이타주의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 쬐는 더운날씨에 급수를 제대로 못하면 도중 병원에 실려가거나 죽을 수도 있다. 실제로 팀원 중 한명은 열사병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나를 소홀히 하고 상대에게 더 많이 베푸는 것은 문맥상 너무나 아름답다. 존경스럽지만 어리석다. 사람은 이성도 있지만, 존재하고 있는 육체도 살펴야 한다. 그사람의 이성과 영혼이 아름다워도 육체가 없으면 베풀 수가 없다.
최소한 자신을 지키고, 베풀어도 늦지 않다. 이건 "자존감" 의 문제다. 자신을 진정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 사람이 다른존재를 어떻게 사랑하고 존중하며, 돌보는게 가능한지 궁금해진다.
자존감이 낮을 수록, 이타주의성을 띄지만 그것은 진정한 이타주의가 아니다.
헌신은 꼭 재화가 아니더라도 정신적인 것 으로도 베풀 수 있다.
그럼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신성한 육체까지 헌신하셨다.
크리스천으로써 내가 하고싶은 말은, 위대한 "신" 을 따라하려는 건, 교만일 수 있다. 근대에도 진정 정의와 평화를 위해 분신자살 하는 영웅들이 있다.
그 죽음은 매우 값지다. 실제로 사회적인 변화에 기여하는 영향력이 크다. 그렇다면 작은일이든 큰일이든, 일이 생길 때마다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죽어버리면, 세상은 누가 살아야 되는가?
그리스도는 그것이 임무였다. 그것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임무였다.
9:1. 이것은 자신을 먼저 챙기고, 남은 재화를 나누자는 "십시일반" 에서 따왔다. 교회의 "십일조" 도 어원은 비슷하다.
정확한 어원은 10분의 1이지만, 열개를 총액으로 봤을 때 9:1 정도가 이상적인 "합리적 이타주의" 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당장 돈이 없고 배고프면 세금부터 잘 내는 것으로 시작해서, 여유가 생길 때 조금이라도 띄여서 베푸는 것이 자신도 지키고 다른사람도 "부담없이, 아름답게" 지키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타인을 돌 볼수도 있지만 회피 할 수도 있다. 자신을 돌보는 건 어떤가? 회피 할 수가 없다. 다른사람은 자신을 "직시" 해주지 못한다. 여기서 이미 효율성이 판가름 난다. 자신은 자신이 지켜내야만 한다.
물병의 오류는, 서로의 목마름 정도다.
상대가 물을 원했을 때 나와 상대중 누가 더 절실한가? 판단 하기 쉽지 않다. 다만 내 몸이 절실한 지, 덜 절실한지는 판단 할 수 있다. 버틸만 하다면 주면 되고, 내가 절실하다면 한번 더 고민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이론이며, 이 오류는 "혈연" 으로도 이어진다. 혈연 특성상 배우자, 가족에게 만큼은 서로서로가 타인보다 진실되기 때문에 즉,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앞 서는 것이다.
개인적 이념을 가진 사람의 3:7, 5:5 혹은 그 이상을 행하는 행위를 위선적이다 라고 폄하 할 순 없다. 다만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비율, 그리하여 대중적으로, 모두가 행할 수 있는 황금율에 대해서 궁금 할 뿐이다.
명심할게 있다. 한번 더 반복하지만, 상대가 "극단적인 상황" 일 때는 이타심은 "의무" 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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